다완
다완을 구했습니다. 깨어지지 않을까 갓난 아이를 안듯이 품에 안고 차실에 들어와서 포장을 조심스레 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발이 다완일 수 있고, 세상의 모든 완 또한 다완일 수 있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이 다완을 만드신 도예가님도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하지만 다완을 두 손에 잡으면, 그리고 두 팔을 들어올려 얼굴을 한 가득 묻어보면, 모든 완이 다완일 수도 있겠지만, 다완은 다완만의 그것이 있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예가님도 그러셨단 말이예요, 자서전에서. 다완을 만들 때 지켜야할 약속들이 있다고요.
이케아의 스프 그릇에도, 오목한 아무 접시에도 격불해서 차 마실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길가의 웅덩이 흙탕물을 퍼내고 거기에 격불해서도 차 마실 수 있어요. 문제 없단 말입니다. 차 마시는 마음은, 그 정신은, 그리고 그 경험은 반드시 그릇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이 도예가의 다완을 꼭 가지고 싶었어요. 예쁘고 맑고, 섬세한데 강직하고, 조용하지만 어디에 내려 놓아도 굵고 단단하게 자리를 붙잡고 있는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마치 야무지게 어여쁜 산짐승 처럼요. 또렷한 눈빛 처럼요. 도예가의 글에서, 해맑은 웃음에서, 어려운 삶의 고비에서도 물레를 돌리던 삶의 흔적에서 느낄 수 있어요. 그가 만든 그릇은 다를 것이라고요.
말차가루가 고이고, 물이 덮어지고, 거품이 쌓여가는 게 예쁘네요. 그저 그릇일 뿐이다. 아마 도예가님은 스치듯 무뚝뚝하게 말씀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도요, 예쁜 그릇에 차 한잔 부어 먹어서 마음에 용기가 생기고 시선이 맑아진대면, 저는 선생님 그릇을 구해서 차를 마시고 싶어요!
느낄 수 있어요. 세상의 굴곡을 양 옆으로 위 아래로 손으로 짚어가며 겪어낸 사람들은 무얼 해도, 글 한줄, 말 한마디, 그림 한 점, 눈을 감고 뜸에도 다름이 있다는 것을요. 이미 작고하신, 나는 미처 만나보지도 못한 이 도예가를 한번쯤 만나보고 싶어요. 차 따라놓고, 한 십분 주먹으로 소리없이 눈물 훔치고, 한 십분은 웃다가 나오고 싶어요. 선생님 그릇이(만) 좋은게 아니예요. 선생님이 이겨낸 삶을, 구워낸 삶을 선생님 그릇보다 더 좋아 하는것 같아요.
다완을 구했습니다. 쏙 마음에 들어요. 깨어질까 품에 안았는데, 깨어질 것은 그릇이 아니고, 제 마음인가봅니다.
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