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
제이슨,
차실은 어때? 그래 한국에 비가 좀 오고 있다고 들었어. 잘 지내고 있는거지?
나도 별 일은 없어. 계속 작업하고, 사람들 만나고, 어제는 뉴헤이븐에 다녀왔어. 학부 때 교수님이 전시를 하신다고 하셔서 갔다가, 교수님이랑 신나게 수다 떨고, 하룻밤 자고 맛있는 점심 먹고 돌아왔어.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어. 찰스강에 앉아 있었어. 여긴 이제 꽤 쌀쌀해. 그리고 낙엽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어. 오후 4시면 해가 없어지는 보스턴의 겨울이 턱 밑까지 온 기분이야. 근데 제이슨, 나는 올 겨울 꽤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더 이상 겨울, 밤, 질척이는 젖어 녹은 눈, 바람 같은 것들이 두렵거나 아프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을 했어.
아! ”비슷한 생각“ 얘기를 해볼까? 찰스강은 서에서 동으로 흐르지, 대서양으로 흘러가니까. 근데 물을 가만이 보고 있으면, 물이 반드시 그렇게 흐르는 건 아냐. 아니, 물은 그렇게 흐르지, 그런데 물의 어떤 부분은 반대로 흐르기도 해. 진짜루. 그냥 멋진 말을 하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야. 바람이 불면, 물의 어떤 표면은 거꾸로 움직여서 거슬러 흐르는 것 같기도 해. 하지만 전체 찰스강 물의 큰 덩어리는 찰스강이 생겨난 이후로,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겠지. 아마도?
커피를 쥐고 있었어. 가만이 커피가 온몸에 퍼져가고 있었어. 물을 한참 보다가 문득 덜컥 겁이 났어. 물은 좀 그래. 평온을 주기도하고, 두려움을 주기도 해. 그리고 찰스강은 어떻게 매번 그렇게 짙푸를까? 덜컥 겁이 났어. 물에서 와서 그럴까? 우리 모두가? 그래서 모든 것이 시작한 물성을 보거나 느끼면, 편안하고도 두려워지는 걸까? 밟고 지탱할 수 없어서, 빠지면 한없이 빠져들기 때문에 그럴까.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도 이해할 수 없었어.
운전을 할까하다가 교수님이 역까지 나와주신다고 해서, 기차를 타고 갔어. 그 때도 찰스강을 따라 걸어서 사우스 스테이션 까지 걸었어. 나는 그 강변이 좋아서, 보스턴을 떠나지 못할 것 같아. 물은 중요해 나에게, 그리고 모든 물은 두려움과 편안함을 주고, 찰스강의 강변은 그 두가지 감정을 공평하게 느끼기 안전한 느낌이야.
허드슨 강이나 이스트 리버는 강 같지 않아, 그냥 바다 같아. 왜 그럴까? 베를린의 그 작은 강은 시냇물 같았어. 물이 주는 웅장함을 느끼지 못했어. 편안함 보다는 하나의 고여져 있는 무언가 같았어. 작고 귀여운 뱀 같달까? 찰스강은 온전한 느낌이야. 그리고 찰스강이 이런 느낌 일지 알지 못했어. 학교를 고르는 게 우선이었지. 어떤 강이 흐르고 있을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거든.
삶이 오는 건지, 가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사라지고 생겨나는건지 생겨나고 사라지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고? 너는 참 생각을 얇게 잘라서 하얀 접시에 올려 두고, 한참 바라보는 사람 같아. 그리고 나는 네 생각의 저며진 단면들을 꽤 잘 이해할 수 있어.
제이슨, 동시에 일어나는 거야. 살아가며 죽어가는거고, 태어나는건 죽는거야. 생겨나는것과 사라지는건 동시에 일어나고, 미움과 사랑은 순차적인게 아니야. 기쁨과 공포는 같이 다가오고, 두려움과 설렘은 다른게 아니야. 네가 가르고 나누고 구분하고 분별하려고 하는 많은 것들은 사실 네 관념과 기준에 따라서 정해지는 거야.
그게 도움이 되기도 하지. 삶을 정리하고 정돈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좋고 나쁜 버릇이라고 할 수도 없어. 왜냐하면 좋다 나쁘다도-예상했겠지만-결국 같은 개념이거든.
오늘따라 내가 너무 당당하게, 정답인 마냥 얘기했지? 웬지 알아? 나는 이 생각을 35년해왔어. 그리고 내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틀렸을 수도 있겠지? 그마저도 괜찮아. 왜냐하면 괜찮지 않기도 하거든.
아침에 맛있는 토마토를 사왔어. 왜, 좀 작고 빨갛고 단단한 토마토 있잖아. 얇게 저며 잘라서 도마위에 펼쳐 올리브 오일을 뿌리고 후추 조금해서 토스트를 씹으며 우유랑 함께 먹었어.
11월 말에 한국에 잠깐 갈 거 같아. 그 때 차실에 들릴게.
찰스강에서-
제이.